Jenny Cho
Illuminating Shade for Big Window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
Part.1 Sick Prophet and Old Magician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


갤러리기체는 4월 29일부터 6월 12일까지 제니 조 작가의 개인전 “큰 창을 향해 열려있는 반짝이는 그림자” 전을 개최합니다. 



<누워있는 포크와 예수의 몸>


안소연



1. 죽음의 불가능성과 죽음 이후의 회화


누워있는 사람의 몸을 가장 먼저 봤을 때, 두 개의 형상이 떠올랐는데, 하나는 고대적인 인간 형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테이블 한가운데 논리 정연하게 놓여 있던 (그) 포크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 Untitled(after Hunter Gracchus)>(2018-2020)는 무제이지만 사냥꾼 그라쿠스를 단서로 하는 숨은 서사가 있다. 그림 속 얕은 공간에 깊이 누워 있는 사람은 그라쿠스인 게 분명해 보이는데, 그는 이미 죽었으나 죽음에 갈 수 없는 육신을 나룻배에 싣고 자신에게 임한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해 증명해 보인 사람이다. 죽음에 도착했어야 할 몸을 실은 나룻배는 수면 위를 표류하면서, 사냥꾼 그라쿠스가 죽지 않았음을 드러내며 (골고다의 십자가처럼) 육신의 현전을 환기시킨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에서, 얇은 천을 덮고 나룻배에 누워 있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몸은 만테냐(Andrea Mantegna)가 그린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떠올려 준다. 사실, 만테냐의 (고대적인) 인간 형상을 전유(appropriation)하여 모리스(Robert Morris)가 표현했던 더치 슐츠(Dutch Schultz)의 몸을 재전유(re-appropriation)한 제니 조의 회화는, (표면적으로는,) “죽어있는 육신”의 현전을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복잡한 사건들을 추려내 참조한다. 나룻배는 죽은 자의 관에 대한 은유로서, 제니 조는 또 다시 데이나 슈츠(Dana Schutz)의 열린 관을 연상시키듯, 죽음의 불가능성에 직면한 육체의 머리맡에 평평한 침상을 두는 대신 깊숙한 추상적 공간감을 암시하며, 현실에서 반복되는 유예된 시간들에 대해 더듬어 볼 자리를 내어놓는다.


이때, 만테냐와 모리스와 슈츠의 회화에서 “죽임 당한 육신”이 지닌 함의는, 그 육체에 대한 낙인과 그 육체에 주어진 희생이며 그 대속(redemption)에 의한 (낙인 찍힌 자들의) 구원이다. 그리고 이 죽음의 형상은 제니 조에 의해 다시 전유돼 회화에 관한 죽음(과 구속)의 서사로 재맥락화 된다. 말하자면, 만테냐가 회화에서의 고전적인 인간 형상(의 서사성)과 새로운 원근법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것처럼, 모리스가 만테냐를 전유하여 회화의 신화적 서사성을 당대의 사건과 교차해 놓았는데, 제니 조는 그라쿠스에 대한 문학적 서사로부터 (시간을 되감아) “죽음의 불가능성”에 관한 표상으로 작용하는 “죽어있는 육신”에 대한 회화적 전유의 역사를 뒤적이는 듯하다. 즉, 만테냐와 모리스, 슐츠와 슈츠, 그들 사이를 기이하게 가로지르는 카프카(Franz Kafka)와 소설 속의 그라쿠스, 일련의 이 개별적인 사건들이 함의하는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언적 결말을 제니 조는 시대착오적 연쇄로 병치 시켜 펼쳐 놓은 셈이다.


(그) 포크에 대해 말하자면, 전유한 역사들 보다 차라리 더 멀게 느껴질지도 모를, 무려 2008년 그의 작품으로 관심을 (잠시) 돌려 놓아야 한다. <정물 사진 부조 Still Life Photo-Relief>(2008)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진 부조의 형식을 취하며, 제니 조가 초기 작업으로 분류해 놓은 범주에 속한다. 주로 “in-between(중간자)”이라는 이슈로 조명되는 2008년부터 2015년까지의 회화 작업 중에서도, <정물 사진 부조>는 가장 초기 작업의 맥락을 보여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를 보자마자, 내가 떠올린 기억은 만테냐의 회화에 등장했던 인간 형상과 제니 조의 평면 작업 한 가운데 깊숙이 누워 있던 포크였다. 만테냐의 회화를 전유해 더치 슐츠라는 마피아의 죽음을 중첩시킨 모리스의 작업에서 직접적인 참조점을 끌어와 이를 다시 전유한 제니 조의 회화에서, 공교롭게도 나는 그의 가장 초기 작업을 단번에 떠올렸는데, 화면 속 깊숙한 원근법적 공간감을 단축해 놓은 그 포크(의 포즈)가 실은 탁자 위에 낮게 부유하듯 보이는 이미지의 실체처럼 느껴졌던 기억 때문이었을 테다. 이를테면, 죽음의 불가능성을 증명해 보인 “죽어있는 육신”의 현전처럼 말이다. 그때, 제니 조가 길게 논의를 이어갔던 “in-between” 개념에 주목해 본다면, 사진 부조의 형식이 전유하고 있는 회화적 원근법과 그 전유를 (곧 다가올) 이미 과거가 된 동시대 회화가 참조해냈으니 회화사의 시나리오를 투영해 본다면 <정물 사진 부조>는 제 죽음 이후의 망상을 예언한 셈이기도 하다.


2. 시대착오적 중간자


제니 조의 개인전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 Illuminating Shade for Big Window⟫는 두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 Sick Prophet and Old Magician⟫라는 제목으로 갤러리 기체에서 진행되며, 두 번째 파트는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 Patron Goddesses for Idle Fellows⟫으로 김세중 미술관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열린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는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를 포함해 11점의 회화로 구성되었고,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에서는 초기 작업과의 단절(혹은 그것의 확장)을 알리며 2016년부터 설계된 “힌지 프레임 세트 Hinge Frame Set”가 전시의 중심축을 이룬다.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는 2017년 신도문화공간에서의 개인전 제목을 다시 가져온 것이며, 각 파트의 전시 제목 또한 장 바티스트 오드리(Jean Baptiste Oudry)의 회화를 전유해서 그린 자신의 그림 제목과 예전 작업의 제목을 각각 참조해 그대로 가져오거나 변형해서 쓴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들은 전유와 참조를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정체성의) 범주화에 착오를 일으키며 선형적 계보의 미덕을 자기 품에 안고 내파시켜 비선형적 역사 쓰기의 (불)가능성을 죽음의 불가능성에 처한 사냥꾼의 육체처럼 눈 앞에 현전해 놓으려는 어떤 이의 속내를 비춘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의인화 된 회화의 육신을 향해 있다.


제니 조는 전유의 방법을 통해 시대착오적 중간자/매개자로서 회화 역사의 둘레를 자유롭게 선회한다. 자유롭다는 말은 쓸모 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관을 지고 기약없이 현실의 수면 위를 떠돌아다니는 (죽은) 사냥꾼 그라쿠스의 육체가 연상시킨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기에 적절한 단어일 지도 모르겠다. 수수께끼 같은 제목의 <회화는 미래다 The Future is Painting>(2017-2020)를 보면, ‘여기서 회화는 무엇이며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인가?’하는 물음이 애먼 그림과 충돌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의 제목이 (무거운) 질문들을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출(터너를 따라) Sunrise(after Turner)>(2020)의 강렬한 태양 빛과 유머러스한 대구를 이루듯 선명한 그림자를 품고 있는 이 회화적 공간-곧 장소성으로 구체화 되는-은, 회화에 대한 시간성으로 마술적인 이동을 감행하여 전시 안에서 회화 간의 역사적 관계와 서사를 특정하는 데 어떤 의미를 파생시킨다.


<일출(터너를 따라)>에서는 하단의 2020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설익은 당대의 시간을 일깨워 주지만, 그 숫자로서의 가변적인 시간과 떠오르는 태양 빛이 공간-대부분은 대기라고 부르지만-을 빈틈 없이 채운 현상적 시간은 제니 조의 회화에서 19세기의 태양 빛과 (서울 한복판에서) 21세기의 태양 빛 사이의 비약적인 “이접”을 성사시킨다. 동향으로 난 큰 창문으로 밝고 뜨거운 태양 빛이 매일 들어와 실내 공간을 모조리 용해시켜 버릴 것 같은 체험적 서사에서, 제니 조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풍경화가 일으킨 회화의 역사적 성취를 참조하여 공감에 다다른다. 말하자면, 현실의 설명하기 어려운 시지각의 인식에 있어서 그는 (터너가 창안해낸 것과는 반대로, 되레 그것을 전유하는) 회화 형식을 가져와 매체에 대한 재귀적 추론에 다가간다. 이를 위해, 그는 시대착오적 중간자로서의 입장을 유지하는 편이다.


<회화는 미래다>의 경우,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 The Balcony(after Magritte)>(2017-2020)와도 희미하게 연결된다. 간결한 서양식 앤틱 서랍장 위에는, 마치 <정물 사진-부조>를 보듯, 크고 작은 카톨릭 성물과 이국적인 장식물과 전자 시계 및 크리스마스 카드가 정갈하게 놓여있다. 할머니의 세련되고 오래된 고급 취향에 새롭게 얹어진 개종의 증거물들이 성모 마리아의 머리 (그림자) 끝에서부터 서랍장 양쪽 모서리까지 이어지는 원근법적 공간을 차분히 구축해내고 있다. 제니 조가 “(새로운) 바로크 양식에 관한 회화적 탐구”라고 언급했던 이번 전시에 관한 설명에서, 나는 일련의 극적인 빛의 대비와 과장마저 소진돼 버린 “(새로운) 바로크적” 기이한 변형 위에 죽음의 불가능성을 표상했던 육체(들)의 형상을 중첩시켜 본다.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에서, 제니 조는 밋밋한 서울 아파트 벽지 앞에 놓인 서양식 앤틱 서랍장 위 성물과 장식물의 (축 늘어진) 상징처럼 “발코니”를 캔버스에 가져왔다. 마그리트(René Magritte)에 대한 참조이자 전유인 이 회화에서, 제니 조는 (이 또한 시대착오적인) “정체성”의 이슈를 끌어와 더 얹는다. 마그리트는 마네(Edouard Manet)의 발코니를 전유하고, 마네는 고야(Francisco Goya)의 발코니를 전유하였으며, 이 전유의 역사/족보를 따라 제니 조는 마그리트를 다시 전유해, 화면 가득 발코니의 패턴을 그려 넣었다. 발코니와 그 너머의 회화적 공간 안에 역사적인 화가들이 등장시킨 대상은 (고전적) 인간 형상으로 압축되는데, 마그리크에 와서 인간 형상을 환기시키는 육면체, 즉 죽어있는 육체의 현전이라 말할 수 있는 관으로 변형됐다. (그 족보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하지만 어떤 죽음에 의해 구원받은) 제니 조는, 무거운 관-본유적으로는 서사적인 인간 형상-을 전유하는 대신 그 모퉁이에 있는 꽃과 그것을 장식해주는 발코니의 패턴을 가져다 그리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이 유머를 전유의 오류/오작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 상관없겠다.


육체가 사라진 <베드룸 페인팅 The Bedroom Painting>(2017-2020)이 아무 것도 전유하지 않고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와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 사이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그는, 애초에 오테사 모쉬페그(Ottessa Moshfegh) 소설 속 주인공의 육체를 위한 빈 공간으로 상상했던, (진부한) 회화의 공간을 반복한 셈이다. 이는, 예전에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 Running in Circle Backwards(After Malevich)>(2014)에서 전유의 형식을 통해 동시대성의 시대착오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제니 조의 회화에 대한 성찰과 유머를 떠올리면서, 계속해서 그(의 망상)를 쫓게 한다. 비어 있는 침대는 <일출(터너를 따라)>를 거부할 수 없이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화가의 자리이며, 죽어있는 형상이 죽음의 불가능성의 현전을 나타낼 예언을 담은 회화의 자리이며, 우울증에 시달리며 약을 과다복용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처지와 같은 회화의 (죽음을 위한) 변증법적 자리일 수도 있다. (회화는 자기의 서사를 만든다.)


3. 뜬 구름과 떠오른 구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 Spheres, Mirrors and Folded Papers (a4er Turner’s Perspective Chart)>(2017-2020)를 보고 <정물 사진 부조>를 다시 떠올렸다면, 그것은 이제 나의 지나친 망상인 걸까? 과거 어느 때에, 누워있는 포크 주변을 입체적으로 감싸고 있던 미러 볼과 잘린 테이블보와 화면 너머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를 누군가 알아챘다면,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가 그 오래된 작업이 봉인되어 있는 작업실 책상 서랍에서 그림 그린 이의 노트와 함께 발견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내 망상에 대해 너무 정색하지 말기를 바란다.


제니 조는 <구, 거울 그리고 접힌 종이(터너의 시점 차트를 따라)>에서 터너가 원근법 강의를 위해 준비한 드로잉을 전유했다. 시지각의 논리를 입증한 터너의 드로잉 차트는 흥미롭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니 조는 그것을 전유하여, (들고 다니느라) 접어 놓은 종이 위에서 망막(의 한 점)으로부터 쏟아지는 질서정연한 원근법적 시지각의 피라미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상상하다가 모순과 불가능성을 잔뜩 지닌 회화 여덟 점을 그려 놓은 듯하다. 정사각형의 이 회화 연작에서, 제니 조는 구와 거울과 접힌 종이의 열화된 이미지들, 말하자면 “죽어있는 육체”와도 같은 허상들을 스승 삼아 쫓고 있다. 그것은 또 동시대의 회화로서 손색 없는 참조들을 걸친 채 회화의 역사로 회귀하(려)는 진지한 물음들을 남긴다. 제니 조가 초기 작업에서 서양 회화사의 원근법적 시지각의 논리를 탐구하며 재현해내고자 하는 실험에 몰두했다면, 최근 몇 년 간의 작업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는 회화사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전유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회화적 성취(의 불가능성)에 대한 당위를 더욱 모호한 국면으로 끌고 간다. 


전시장에 기념비처럼 놓인 <힌지 프레임 세트-흰 색과 검은 색>(2015)를 보자. 내부가 텅 빈 알루미늄 프레임 구조물은 제니 조가 2015년부터, 마치 접힌 종이를 펼쳐 놓은 것처럼 이동과 보관에 용이한 회화 프레임 구조로 설계한 결과물이다. <힌지 프레임 세트>는 회화적 조건에 대한 실험을 가동시켜 그 결과물의 유효성을 알리는 일련의 마술적인 무대와 같다. 그는 여기에 햇빛 가리개로 쓰였던 빛 바랜 (대가들의) 회화 이미지들을 망막에 드리워진 시지각의 한계를 뚫고 일체의 숨김없이 보여줬었다. 이번에는 그 열화된 회화 이미지들의 지지체에 불과한 <힌지 프레임 세트>를 전시장 한 가운데 세워 놓고, 그 비어 있는 큰 창들에 새로운 원근법을 그려 넣기로 한 모양이다. 제니 조는 허공에 떠오른 구 대신에 구름을 놓았다.


모두 (그) 구름을 가리킨다. 큰 창을 향해 제니 조는 증강 현실(AR)로 구름을 보여준다. 유머러스하고 세속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구름을 모두가 쫓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직선의 피라미드를 평면에 그릴 필요가 없다. 비정형의 자국들을 남기며 움직이는 구름을 따라 (예정된) 경로 안에서 구름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만이다.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 Patron Goddesses of Idle Fellows are the Clouds>(2021)에서, 제니 조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고대 그리스 희극 「구름」을 참조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유머와 풍자를 빌려 와, 그는 역사적인 회화의 매체적 조건에 대해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가?”하는 물음을 던지다가 또 다시 (누군가가 예언했던) 동시대 회화의 새로운 위상에 대해서도 “귀여운” 망상을 더해 나룻배를 타고 수면 위를 떠도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죽어있는 육체 같은 구름을 유희하며 쫓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나룻배 혹은 열린 관을 연상시키는 그 깊은 추상적 공간으로서의 “힌지 프레임 세트”에, 제니 조는 떠도는 정체성으로서의 화가인 자신의 원근법적 풍경들을 옮겨다 놓았다. 서울에서 본 (비서구 대가들의) 회화들, 서울과 뉴욕과 휴스톤의 풍경들, 회화에 대한 자신의 원근법적 시각을 담은 구조물 드로잉들, 일련의 위계 없는 이 이미지들을 포토샵으로 편집해 UV 프린팅 하여,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를 눈 앞에 가져다 놓았다.



















<‘회화가 미래다’: 제니 조의 대안적 회화의 조건>


이채은

제도로서의 회화


회화는 오늘날 유효한가? 이는 제니 조가 이번 개인전 《큰 창을 향해 반짝이는 그림자》에서 화두로 내세우고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우리는 여러 맥락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첫째, 다다이즘에서 개념미술로 이어지며 가속화된 미술의 개념적 전환 이후 매체 특정적 가치를 찾는 시도가 무색해졌다. 더이상 매체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개념적 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 응용 및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회화’라는 카테고리 자체의 의의도 모호해진 것이다. 둘째, 미국의 비평가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1981년에 「회화의 종말 The End of Painting」이라는 글에서 진단했듯 회화는 1960년대 이후로 수많은 비평가와 작가들에 의해 이상주의와 엘리트주의 및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산물로 비판받아왔으며,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회화는 의미있는 카테고리로 존속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위해 선제되어야 할 회화의 대안적 조건이란 무엇인가? 제니 조의 작업은 이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BBC TV 시리즈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1972)에서 존 버저(John Berger)는 유럽의 회화 전통을 뒷받침하는 사회문화적 관습과 법칙을 파헤쳤다. 그는 유화나 원근법과 같은 회화의 장치에 대한 설명과 일련의 상호연관된 이데올로기 – 가령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본주의 및 식민주의 – 의 전개에 회화가 미친 영향을 탐구하면서 관객이 회화의 보편성, 객관성, 자율성에 대한 신화적 환상을 깰 수 있도록 했다. 버저의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 페미니즘 미술, 제도비판적 미술 등의 등장과 함께 가속화된 미술의 전통 혹은 ‘제도로서의 미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회화의 전통과 이를 동반한 관념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가를 천재적 개인으로, 작품을 유일무이한 개별의 창조물로 보는 낭만주의적 인본주의의 시각은 미술 시장의 핵심 논리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타자에 대한 상품화 및 (성적) 대상화의 경향도 특히 광고나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미술 및 미술사의 ‘글로벌화’에 대한 논의가 크게 확장하고 있으나 미술계과 미술사학계에 뿌리깊게 침투해 있는 식민성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국에서 교육 받은 한국 여성 화가라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서구 전통과 제니 조 작가는 꽤나 ‘어색한’ 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작가는 본인의 정체성을 기존 회화의 전통 안에 단순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회화의 언어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몰두한다. 즉, 제니 조 작가의 이번 작업들은 본인의 문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역사적 담론의 변화에 기반하여 회화의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이번 전시에서 드러나는 제니 조 작가의 방법론적 특성을 ‘차용’, ‘다층성’, ‘관계성’으로 파악하고 어떻게 이 개념들이 회화의 ‘종말’ 이후의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대안적 회화의 조건: 차용, 다층성, 관계성


현재 갤러리 기체에 전시되어 있는 작업들은 전부 회화인데, 그 중 상당수가 서양 미술사의 주요 화가 및 작품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런 과거로의 재귀는 일견 시대착오적인 것 – 회화의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한 낭만적 소회 – 으로 읽힐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셰리 레빈(Sherrie Levine)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이 차용을 통해 원본의 내재적 가치를 무효화하고 가치가 생성되는 원천으로서 사회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경우를 떠올려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제니 조의 차용은 과거에 대한 향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통에 대한 불경하거나 유희적인 태도보다는 시공간의 다층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회화의 개념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 비교해볼 수 있는데, 팔림프세스트란 고대에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긁어내거나 흐릿하게 한 후 새로 쓴 문서를 일컫는다. 이 때 기존의 글자들은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아 그 흔적이 남아있게 된다. 표준화, 직선화, 분절화된 현대의 시공간 관념과 달리 불연속적인 시공간이 중첩되어 공존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니 조는 그가 평소에 접했던 회화, 영화, 또는 문학 작품들을 지표삼아 그 안에서 마주한 다양한 시공간들을 회화 속으로 끌어온다. 가령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2018-2020)는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 Lamentation of Christ>(1480)를 전후 미국 작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1989년에 차용해 그린 <금지의 종말 또는 더치 슐츠의 죽음 Prohibition’s End or the Death of Dutch Schultz>을 모델로 하여 그린 작품이다.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2017-2020)와 <어려운 횡단(마그리트를 따라)>(2017-2020)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동명의 작품을 차용한 것으로, 원작에서 특정 디테일(발코니의 난간과 배가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는 그림 속의 그림)을 추출해 다른 시공간의 파편들과 함께 재구성했다. <정물(라르장을 따라)>(2017)는 프랑스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돈 L’argent>(1983)에 나오는 한 장면을 기반으로 그린 것인데, 이 작품 또한 1911년에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가 쓴 소설 『위조 쿠폰 Forged Coupon』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한편 <일출(터너를 따라)>(2020)은 초월적 성격의 숭고미와 대기의 변화하는 순간성을 융합한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J. M. W. Turner)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하단에 트롱프 뢰유(trompe-l’oeil) 기법으로 작품 제작 연도 표기(2020)를 그려넣음으로써 초현실주의적인 층위를 더했다.


많은 경우, 작가가 확대하거나 추가 및 수정한 요소들은 작가 본인의 중간자적인 정체성, 여러 지역을 떠도는 유목민의 삶, 서로 다른 문화권이 복잡하게 만나는 만남의 순간 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발코니(마그리트를 따라)>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난간의 이미지는 관람객의 공간과 꽃이 부유하는 모호한 추상의 공간을 분리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열린 구멍 사이로 이 공간들을 연결시키기도 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의 경우 작가는 원작의 침상의 자리에 배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소설 「사냥꾼 그라쿠스 The Hunter Gracchus」(1931)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냥꾼 그라쿠스는 망자도 산자도 아니며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운명에 처한 것으로 그려진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장 밥티스트 우드리를 따라)>(2020)는 라퐁텐(La Fontaine) 우화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잘 알려진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우드리(Jean Baptiste Oudry)의 <늑대와 양 Wolf and Lamb>(c. 1751)을 재구성한 것으로,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치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포착했다. <회화는 미래다>(2017-2020)는 좀 더 작가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레퍼런스를 활용한 작품이다. 이 정물화에 등장하는 종교적인 공예품을 비롯한 여타 장식품들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작가의 할머니가 미국과 한국에서 다양하게 사 모은 것들이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도상들을 복제한 것들, 작은 프란시스 교황 조각상, 눈사람 모양의 크리스마스 기념품,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진 시일의 단서가 되는 시계와 달력 등이 서로 다른 시공간을 복잡하게 연결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가로지르는 작가(와 작가의 할머니)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제니 조는 작품의 전체적 짜임을 구상하고 배치하는 데 있어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성 또한 드러내고자 했다. 각각의 작품들은 일견 아주 다른 모티프와 스타일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들을 전시장에서 함께 놓고 보았을 때 작품들 사이에서 어떠한 의미의 주고받음이 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의 침상/배 옆에 놓인 <베드룸 페인팅>(2017-2020)를 예로 들어보자. <베드룸 페인팅>은 젊은 미국의 소설가 오테사 모쉬페그(Ottessa Moshfegh)의 9/11 테러 직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 『휴식과 완화의 한 해 My Year of Rest and Relaxation』(2018)에 영감을 받아 그려진 것인데,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철회하고 싶어 각종 약물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잠을 자며 사는 삶을 설계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룸 페인팅>에서 생기 없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침실 이미지로 표현되었으며, <무제(사냥꾼 그라쿠스를 따라)>가 전달하는 그라쿠스/예수의 이야기에 현대적인 층위를 덧붙이는 기능을 한다. <병든 예언자와 늙은 마법사(장 밥티스트 우드리를 따라)>와 <일출(터너를 따라)>의 병치도 흥미롭다. 두 작품 모두 동적인 붓질을 활용한 반추상의 형식과 단색조 혹은 매우 적은 수의 색조를 활용하여 아주 작은 스케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법칙 – 지구의 자전과 약육강식의 법칙 – 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해 낸다는 점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제니 조의 회화 작품들은 하나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의미와 정서의 확장과 변모를 다각도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관계성은 김세중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의 두 번째 파트에서 회화 이외의 작업으로까지 확장된다. <힌지 프레임 세트>(2015~)와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2020)은 각각 건축적 요소와 증강현실(AR)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작품으로, 제니 조의 개념적 실험이 회화 이외의 매체로 구체화된 예시로 볼 수 있다. <힌지 프레임 세트>는 직각의 알루미늄 프레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립할 수 있게 한 가변적인 걸개 시스템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박서보나 민중기 같은 한국 작가들의 전시 전경을 찍은 사진과 서울, 뉴욕, 휴스턴에서 찍은 다양한 도시 및 자연경관의 사진들을 유리 패널에 프린트해 함께 전시했는데, 이 사진 이미지들은 포토샵을 통해 합성되고 필터가 입혀져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게끔 처리됐다. 이 유리 패널들은 여러 가지 각도와 배열로 <힌지 프레임 세트>상에 설치되어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에서의 전시 방식과 대비를 이룬다.


한편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은 구름>은 AR 기반 작품으로, 관객은 타블렛을 통해 전시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여러 이미지들을 지우기도 하고 새로 보여주기도 하는 구름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한가한 친구들의 수호신’이라는 말은 작품의 전거가 되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고대 그리스 희극 <구름 The Clouds>에서 구름을 조롱조로 묘사하는 데서 따온 말인데, 소크라테스와 같은 한가한 사상가들을 수호해주는 것은 모양만 화려하고 실속은 볼 것 없는 구름뿐이라는 뜻이다. 제목만 보면 작가가 회화 또는 예술 전반을 조롱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름은 – 상술한 새로운 회화의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게 – 주변 공간 및 이미지들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자유로운 궤도를 그리는 유동적인 주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회화는 미래다


제니 조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회화를 유일무이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보다 유동적이고 다원적이며 관계적인 존재로 변모시켰다. 작가의 이러한 관심과 방향성은 그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 새로운 회화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비평가 얀 베르보트(Jan Verwoert)의 회화의 ‘인접성(adjacency)’ 개념을 들 수 있다.  베르보트가 말한 ‘인접성’이란 단순히 말해 ‘연결 통로’의 역할로서의 회화의 가능성을 일컫는 것으로, 회화를 우리는 전통적 개념의 ‘세상을 향한 창문’도 아니고 모더니스트들이 말한 ‘평면 그 자체’도 아닌, 회화 이외의 개념이나 사물, 세상 ‘옆에’ 존재하며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연결통로’로 개념화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보트의 강연 중에 이 새로운 회화 개념을 셀로판지로 만든 커튼에 비유한 점이 흥미롭다. 색깔과 텍스쳐의 왜곡이 일어나는 이 반투명의 커튼처럼, 회화란 회화 너머의 세상을 불완전하게 보여주는 가림막이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거두어져서 그 너머의 세상을 직접 연결시켜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미술사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 또한 ‘이행적 회화(transitive painting)’라는 개념을 통해 유사한 관점을 전개한 바 있다. 「회화 옆의 회화 Painting Beside Itself」라는 글에서 그는 유타 코외터(Jutta Koether)나 레베카 퀘이트만(R. H. Quaytman)과 같은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작품은 예술적·사회적 맥락의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 놓여져 “무한한 이탈, 분절, 퇴색”을 반복하는 회화의 상태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의 관점에서 제니 조의 작업이 의미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회화의 유동성과 다원성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에 서구 중심의 회화사에서 비껴있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가치 체계를 구성했던 ‘자신과 타자’, ‘아방가르드와 시대에 뒤떨어진 미술’, ‘보편성과 특수성’ 등의 이분법적 사고는 인종이나 국적, 성별 등으로 인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작가들을 이중의 곤경(double bind)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이들은 시대에 앞서있으며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표방하는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계로부터 거부당한 동시에 언제나 성별이나 인종의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해석되었고, 이들의 작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미술’ 혹은 ‘보편성이 결여된 미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제니 조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의 의미는 물론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이 중 핵심적인 한 가지는 방금 설명한 ‘이중의 곤경’으로부터 작가와 작품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데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가 조명하는 시공간 및 문화의 다층성, 다원성, 관계성의 논리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부수적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회화는 오늘날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의 작품 제목 중 하나가 선언적으로 말했듯 회화야 말로 ‘미래’를 열 수 있는 잠재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